[스크랩] 평화공원 산책 그리고 박물관 견학
부산최초의 고등교육기관 부경대학교 - 부산수산대학교가 전신 - 1946.9 개교
식물원 안에는 나무인지 풀인지 구분도, 이름도 어려운 것들이 많다
장항 유적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현장에 안내판과 사진 등이 있더니 지금은 안내판도 흔적도 사라졌다. 가덕도 신항공사로
금동관 - 복천동고분
만덕사지 출토 - 기와편 중에 기비사라는 이름이 있어 만덕사가 아니라 기비사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동래경찰서를 새로 지을 때도 자꾸 유골이 나와 그냥 덮었다는 뒷 이야기가 있었다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
1683년(숙종 39년) 동래부사와 대마도주가 왜관(倭館) 운영에 관한 금제조항(禁制條項) 다섯 가지를 제정,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윗부분은 반달모양이고 재료는 화강석으로 용두산공원에 있었으나, 1979년 부산광역시 시립박물관 경내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1607년(선조 40) 부산의 두모포(豆毛浦: 동구 수정동)에 왜관을 설치, 대마도 관인(官人)과 항거왜인(恒居倭人)이 거주하게 되고, 일본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양국 상인들의 접촉도 많아졌다.
따라서 국금(國禁: 나랏법으로 금함)이 무시되고, 밀무역·잡상 행위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따르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 같은 폐단을 막기 위해 일본측과 여러 차례 약조를 맺어 위반자를 엄중히 단속하였다. 그러나 두모포에서 초량(용두산 일대)으로 왜관을 옮긴 후 그 경역(境域: 경계가 되는 구역)이 더 넓어져 왜인들의 범법행위도 많아지고 다양해져 피해가 심하였다.
이에 168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尹志完)이 돌아올 때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교섭관계를 위임받고 있던 대마도주와 전문 5개조의 약조를 체결하고, 이것을 한문과 일문(日文)으로 비석에 새겨 조선측은 수문(守門) 안에, 일본측은 왜관의 경계지역에 세워서 알리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금하고 있는 경계선 밖으로 함부로 나오는 일이 있으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② 노부세(路浮稅: 조선 상인이 일본 상인에게 진 빚, 倭債)를 주고받는 것을 현장에서 잡으면 준 자와 받은 자 모두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③ 저자를 열 때 각방에 몰래 들어가 비밀리에 물건을 사고파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할 것.
④ 5일마다 물건들을 들여올 때 색리(色吏: 빗아치-어떤 분야에서 일을 맡아보던 사람)·고자(庫子: 참고지기)·소통사(小通事)들은 일본인들을 끌어내어 구타하지 말 것.
⑤ 피차에 죄를 범한 사람은 모두 관문 밖에서 집행할 것. 관내에 있는 사람 중에서 만약 일이 생겨 관외로 나가야 할 때는 왜관의 관리에게 보고하고 통행증을 가지고 조선 측의 훈도(訓導: 사역원 정구품 벼슬)에게 보임으로써 왕래할 수 있다. 각 조의 제찰(制札: 금제의 문서나 게시)을 글로 써서 세워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할 것.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柔遠閣先生埋案感古碑)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 비로 앞면에는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라는 비제(碑題)와 함께 4언의 글귀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비의 건립배경과 목적, 비석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유원각 선생이란 동래부 소속 하급 통역관인 소통사를 지칭하는 것이다. 조선식 비석과 일본식 비각을 결합한 양식으로 조성되었는데, 2001년에 비석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부산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는데, 원래는 동구 초량동의 산 중턱에 있는 개인 주택에 있었다. 1999년 부산광역시 시립박물관에서 현장 조사를 시행하였고, 다음 해인 2000년 9월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조선 후기 대일외교의 실무관청이었던 유원각과 관련된 유일한 자료이다. 특히 비석의 건립배경과 목적이 기록되어 있어 개항기 부산지역사 및 한일관계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동래부사유심선정비(東萊府使柳淰善政碑)
유심(1608~1667]은 1649년(효종 원년) 11월부터 1651년(효종 2) 7월까지 1년 8개월간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동래부 7개면에 모두 선정비가 세워진 동래부사로는 유심이 처음인데, 이는 유심이 동래부사에서 바로 경상감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즉 동래 사람들은 동래부사에서 경상감사로 영전한 유심의 선정비를 세움으로써 계속해서 유심의 선정을 기대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동래읍성 서문 앞에 있었으나
2001년 시립박물관으로 옮겼다.
동래 남문비
동래 남문비는 병사(兵使) 이각(李珏)의 도망, 동래부사 송상현의 죽음, 비장 송봉수·김희수, 향리 송백,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양통한의 순절, 양산군수 조영규의 절의 등 일본군과의 처절한 전투상황과 동래부 군관민의 순국충절 및 비를 세우기까지의 경위를 밝히고 있다.
비석은 1670년에 세웠으며 1688년 부사 이덕성이 중창하고 1709년(숙종 35) 부사 권이진이 충렬사에 별사(別祠)를 세울 때 별사 앞뜰로 옮겨 세웠으나, 1736년(영조 12) 별사를 없애면서 동래읍성 남문 안으로 옮겼다.
1976년 시가지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지금의 부산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다시 옮겨왔다.
비문에는 부산지방의 임진왜란 순절사적이 적혀 있는데, 1668년에 송시열이 짓고, 송길준이 썼으며, 이정영이 비의 제목을 썼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225cm, 폭 121cm로 비의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을 조각했다.
현재 비석은 크게 훼손되어 알아 볼 수 있는 글자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비석은 받침돌 위에 훼손된 비 몸통을 세운 모습으로 있고 그 위에 얹었던 머릿돌은 옆에 따로 놓여 있다.